예수님의 음성

예수님의 음성
요한복음 10장 27절

요한복음 10장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그러나 양들은 세상의 많은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양들은 사람의 소리인지, 하나님의 소리인지, 사탄의 소리인지, 자신의 흥분된 소리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많은 소리들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구분하려면 우리는 고요함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여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 분의 고요한 음성을 들으면 우리는 세상의 음성들 중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구분하고, 우리는 날로 새로워진다.

예수님의 음성은 단순하고, 분별할 수 있는 음성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비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7).”

감사의 기도

감사의 기도
– 이 철 –

뛰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프고 피곤할 때 용기를 주시고
괴롭고 외로울 때 소망을 주셨으며

모두를 지켜 큰 사고 없이 하시고
고통을 헤엄치면서도
아주 빠지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도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온 사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감사를
발견하는 자세를 주소서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월에 태어난 것과
세어도 세어도 끝이 없는
그 많은 감사를 알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게 하시고
질투의 화산 속에 들어가지 말게 하시고
돈을 목적 삼지 말게 하소서

사랑의 속삭임을 내 입술에 주시고
감사의 노래를 내 심장에 주소서

불평하지 않게 하소서
화를 내지 않게 하소서

이해하게 하소서
덮어주게 하소서

악한 생각을 버리게 하소서
모든 일에 감사만 있게 하소서

고난의 유익

고난의 유익
누가복음 4장 48절

누가복음 4장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왕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아들의 병이 들어 그리스도께 나갔다. 군중에 섞여 있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귀한 교훈을 배웠고, 그와 그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가 예수님께 받은 가르침은 그의 아들의 병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의 병이 아니었으면 그와 그의 가정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표적과 기사를 볼 수 있는 때이다. 표적과 기사는 고난을 넘어가는 능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군중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특수한 상황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고난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힐링시간(healing time)된다.

그리스도 안에 겪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건강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질병을 통하여 우리는 더 건강해진다. 우리는 행복과 평안을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과 평안을 잠시 잃었다 찾는다면, 우리에게 주신 행복과 평안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게 된다.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이 지난 후 다윗은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교인들의 아비

교인들의 아비
고린도전서 4장 15절~16절

고린도전서 4장 15절~16절,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 안에 많은 스승이 있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말한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원에 갔다. 기도원에 가서 방언도 하고, 신유(병 낫게 하는 은사)나 축사(귀신을 쫓아 내는 은사)등을 받아 다른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 주기도 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교인들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바울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기도원에서 많은 은사를 받아서 능력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교회에서 본이 되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를 성찰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관찰하여 비난하고 비평하기 보다 자신을 살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함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다른 사람을 비추어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라고 있다. 우리가 말씀으로 우리를 성찰하면 어른으로 자란다. 어른으로 자라야 다른 교인들의 아비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의 아비는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내면을 성장하시켜, 사랑으로 다른 교인들을 섬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

연약한 우리
마가복음 5장 41절

마가복음 5장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장면이다. 달리다굼이란 달리다의 뜻은 연약한, 나약한이란 뜻이다. 굼은 일어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을 “연약한 자여 일어나라”는 뜻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연약한 자의 마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다(마5:3)”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심령이란 영혼을 말한다. 물질이 없어 가난한 자가 아닌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에 영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연약함을 보셨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연약한 소녀라고 보신 이유는 아버지인 야이로의 심령을 보셨기 때문이다. 야이로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이 연약하여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떠나려고 하였다(막5:35참조). 그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마귀는 우리가 연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마귀는 두려움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은 참된 우리의 모습이 아닌 가면을 쓰고 우리가 살아가게 한다. 두려움은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가면을 벗고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고 일어나게 하신다.

11월의 시

11월의 시
-이 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을 떠나는 모습
독약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깊은 눈물은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마음의 질문

마음의 질문
시편62편 1절

시편 62편 1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다 보면 길이 막혀서 헤메일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주님의 거울 앞에 우리를 비추어 본다. 거울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뭘 잘못했지? 무엇때문에 일이 이렇게 엉키게 되었지?’ 하는 질문을 주님께 해 본다.

다윗도 마음 속에 품은 질문을 주님께 드렸다. 시편62편 3-4절에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질문),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답).” 다윗은 마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았다. 아마도 다윗의 질문에 주님이 직접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잠잠히 주님만 바라보라고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질문을 주님께 하여도, 주님은 그 답을 알려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 오늘 말씀은 우리 마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성경은 우리가 가만히 주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답을 찾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고독의 비밀

고독의 비밀
요한일서 4장 1절

요한일서 4장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서 나왔음이라.”

성경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라는 뜻이다. 말씀에 근거에서 자신을 돌아 볼 때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 디트리히 본 히퍼(Dietrich Bonhoeffer)는 “우리는 침묵을 너무 두려워하는 나머지, 자기 자신과 홀로 있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지 않기 위해서, 이 일에서 저일로 자신을 몰아친다”라고 말했다.

홀로 있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가 홀로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있도록 몰아부치실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우리가 사방으로 고립의 벽에 둘러쌓을 때 우리는 홀로 있게 된다. 우리가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때이다. 고립은 고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사인이다.

고독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의도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고독은 하나님과 사랑을의 교제를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고독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독 가운데 유혹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를 한다. 예수님도 40일동안 혼자 사막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였지만 동시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하셨다(마4:1).

하나님은 고독 가운데 우리를 부르신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3).” 고독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고독 가운데 우리가 거짓을 버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침묵 속에 기다림

침묵 속에 기다림
하박국 2장 20절

하박국 2장 20절,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정보화 시대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잠잠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스마트 폰이나 아이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T.V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은 모두 다 통신기기에 집중하여 옆에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아무 말 없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침묵을 불편해 한다. 또한 누군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기다리라고 우리에게 말한다면 그러한 상황은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이 세상 속에 떠돌아다니는 말들 정리하기를 주님은 원한다.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방해 받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 조용하고 잠잠한 시간을 드릴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침묵 속에서 기다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