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은 유익한가?

미국의 기업들은 차별금지법을 따라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미국의 작업장에서 여성 종업원과 소수인종 종업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사회심리학에서 사회촉진(Social facilitation)을 언급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할 때 과업수행을 더 잘하는 경향성을 말한다. 개인이 다른 사람과 함께 경쟁할 때 단순작업이면 과업을 더 잘 수행하지만 복잡한 작업이면 함께 있는 것이 과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된다.

다양성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양하게 고용하는 것이 기업에 이익이 되었는가? 한 연구자가 회사 웹사이트가 작업장의 구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를 근거로 273명의 흑인과 백인 대학생들에게 회사 웹사이트를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끼는지 물었다. 어떤 웹사이트는 3명의 백인 관리자와 함께 있는 백인 종업원들의 사진만 보여주었다. 학생들이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될 경우 그 관리자들이 자신의 상사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두 번째 웹사이트는 백인 관리자와 함께 있는 흑인 종업원과 백인 종업원 모두를 보여 주었다. 세 번째 웹사이트는 백인 및 흑인 관리자와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종업원을 보여 주었다. 실험결과는 백인 대학생들은 웹사이트에 나오는 특정회사에 대한 어떠한 선호도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흑인 대학생들은 관리자들이 인종적으로 다양한 회사 웹사이트를 선호하였다(Avery, 2003). 다양성은 소수 민족자를 고용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다수 민족자를 고용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떤 목사를 좋아하는가?

2005년도에 “한국교회 미래리포트”가 출판되었다. 교인들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당회장 목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6가지 측면으로 물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당회장 목사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설교를 잘한다(89.9%), 신앙생활에 있어 솔선수범하는 편이다(85.4%), 지도력이 있다(85.2%), 개인적인 물질에 욕심이 없다(76.4%), 교인 관리나 행정적 관리를 잘한다(75.5%),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53.1%)이었다. 목사는 목자라고 하는데 양에 대하여 알고 있는 목자는 53.1%에 불과하였다.

지금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떤 목사를 좋아하는지?” 하고 묻는다면 설교를 잘하는 목사, 도덕성이 높은 목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목사, 사람들을 잘 이끄는 목사, 영성 있는 목사 중에 어떤 목사를 선택할까? 목사는 영성이 높아야 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영성이 높은 목사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나지막하게 해본다.

섬김의 의미

섬김의 의미
마태복음 20장 28절

현대 교회 안에서 많이 들리는 소리 중에 하나가 ‘섬김’이다. 영적인 권위적인 목사에서 섬기는 목사, 영적인 능력보다 섬기는 교인들을 현대교회에서 요구한다. 섬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20장 27절과 28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섬김의 뜻은 섬김=종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최연(홍익대학교)교수는 섬김을 ‘자기 희생적 리더십’라고 표현했고, 자기희생을 하면 카리스마, 즉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얻을 수 있고, 정통성을 확보하며, 섬기을 받는 사람이 섬김의 빚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된다고 말했다. 동시에 섬김을 통하여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조직은 쇠퇴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섬김을 조직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조직은 발전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희생만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가 섬김에 대한 의미를 재정의하게 한다. 교회가 사랑으로 성장하지 않고 섬김을 강요한다면 그 섬김은 의미없는 한 사람의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처하여 있는 교회 문화에 맞도록 섬김의 의미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교회 상황에서 섬김은 무엇인가? 아마도 각자 처해 있는 교회의 상황에 따라 섬김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중심적인 의미는 섬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 만약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섬김을 받는데 머물러 있다면, 그 섬김은 사람을 죽이는 섬김일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골로새서 1장 19절~23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다는 말이 있다. 이를 한자성어로 거자일소(去者日疎)라고 하며 ‘사람은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는 뜻이다. 골로새서 1장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들”이라고 예전에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악한 행실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여기서 마음이란 생각을 말한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악한 행실로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악한 행실로 인하여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골1:20). 그리스도 안에 화평을 이룬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이 우리의 행실을 바꾸어야 한다. 즉 우리의 믿음이 행위로 표현되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나요?

1927년 기독신보에서 교회의 쇠퇴의 원인과 희망을 다룬 적이 있다. “교회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점점 줄어가는 형편이다. 그 원인인 첫째, 사상문제. 교회는 사상계 지배 능력이 없다. 오히려 세상 사상에 요동한다. 둘째, 경제문제. 곧 생활문제이다. 사회경제 피폐하여 교회는 재정 핍절로 현상 유지를 못한다.” 90년 전에 기독신보에서 이야기 했던 현상들이 지금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세상의 원리가 말씀의 원리보다 앞서는 교회, 믿음보다 돈이 앞서는 교회는 쇠퇴하게 된다. 반대로 소망이 있는 교회는 말씀의 원리를 순종하는 교회, 주님을 따라가는 교회가 소망이 있다.

어떤 목사님에게 “왜 목사님이 되셨나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밥을 먹지 못하던 때에 어머님이 밥을 아랫목에 따뜻하게 데워서 목사님을 가장 먼저 드리는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대답하였다. 교인들에게 똑같이 묻고 싶다. “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시게 되었나요?”

먼저 나신 이

먼저 나신 이
골로새서 1장 15절~18절

오늘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다. 15절에 주의 깊게 읽을 부분이 있는데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이다. ‘먼저 나신 이’를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창조된 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나신 이’는 King James Version에 ‘firstbone of every creature’라고 말하고 있으며 , 먼저 나신 이의 뜻을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 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창조 때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뜻은 창조 하실 때 계신 분이라는 뜻이며, 모든 창조를 시작 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누구 안에 있는가?

누구 안에 있는가?
골로새서 1장 12절~14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유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흑암의 권세에서 예수님께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구하셔서 그 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었기 때문이다(골1:12-13).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다. 여기서 죄사함이란 ‘Redemption’을 말하며, 이를 번역하면 ‘구속’을 의미한다. 구속이란 원래 상업적인 용어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죄의 종이 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보혈로 그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음을 의미한다(엡1:7; 고전1:30; 골1:14; 히9:15).

우리가 죄사함을 얻게 되면 마귀에서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마귀에게 자유로운가? 우리는 죄에 유혹을 받고, 죄를 짓고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성경은 우리가 마귀로부터 자유롭다고 선포하는데 우리 환경을 보면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이 느낄 때가 많다. 우리가 이렇게 연약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보이신 부활을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골로새서 1장 1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아들 안에’ 우리가 속량함을 입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골1:14).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어둠의 권능을 이기고 그 분의 왕국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누구 안에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보면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누가 크리스찬 리더인가?

누가 크리스찬 리더인가?

어제(2017년 1월 23일)는 계재광 교수(한남대학교 기독교학교수)가 인도하는 “미래교회 리더를 위한 크리스천 리더십”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한국 기독교 리더십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대에 따라 리더십 이론이 달라졌다. 혼란한 시대 1,2차 세계 대전이 있었던 시대에 리더십은 리더 개인의 특성과 역량이 중요한 이론이였다.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리더십은 리더 개인의 특성과 역량도 중요하지만 추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추종자까지 고려한 리더십 이론이 생기게 되었다. 20세기 말부터 정보산업화 시대라고 한다. 정보화 시대는 급변하는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리더십 이론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여 리더 개인의 특성과 역량, 추종자와 함께 상황을 고려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체성을 강조한 리더십 이론이 성장하고 있다. 지속적인 개인주의와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속에서는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한 도덕적 리더를 요구하게 된다.

요즘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분명해진 시대이다. 믿음은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공적인 장소에서 개인의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다. 시대에 요구에 발맞추어 성도들은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 교제에 열광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사회와 동떨어진 또 하나의 ‘조선시대의 절’이 되고 있다. 교회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크리스찬 리더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가? 하나님이 보낸 크리스찬 리더는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 관계로 맺은 사랑을 이웃에게 보여주고 실천하면서 Kingdom of God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리더, ‘크리스찬 리더’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

가장 먼저 구하여야 하는 것
골로새서 1장 9절~12절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첫째, 모든 지혜와 영적 깨달음에서 그 분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고, 둘째, 주께 합당하게 걸어서 모든 일에 그분을 기쁘게 하고, 셋째,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넷째, 하나님 아는 것에서 자라고, 다섯째, 그 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되며, 여섯째,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고, 일곱째,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상속 유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구하여야 할까? 지혜와 영적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가 있어야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서 살 수 있다. 영적 깨달음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하면서 살게 된다. 요즘은 가짜가 진짜같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면 특히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
골로새서 1장 3절~8절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 믿음은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고, 이 소망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다. 너희의 믿음은 에바브라에게 배웠다. 성령 안에서 너희 믿음을 나타내게 되었다.”

오늘 말씀은 믿음 안에는 소망, 배움과 성령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러나 마귀는 환경을 통하여 믿음 안에 있어야 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빼앗으려 한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소망을 잃게 된다. 교만해지면 배우려 하지 않는다.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없다. 믿음 속에 있어야 할 세 가지를 지키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감각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해야 한다(히5:14).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살면 믿음 안에 세 가지를 잃게 되며,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믿음 안에 세 가지를 지키게 된다.

결국 믿음은 세 가지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소망만 있는 믿음, 배움만 있는 믿음, 성령 안에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소망, 배움, 성령 안에 믿음이 산믿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