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껍질이 벗겨질 때

단단한 껍질이 벗겨질 때
창세기 33장 1절~17절

창세기 33장 3절~4절,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아내가 D.I.D(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가 무엇의 약자인지 물었다. “Dissociative Disorder(해리장애)”라고 말했다. 그러면 가운데 “I”의 약자가 무엇의 약자인지 아내가 다시 물었다. “Dissociative”의 앞에 단어인 “Di”의 약자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미심쩍은 듯이 다시 한 번 물었고, “Dissociative를 Di로 줄였어”하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책장에서 DSM-5(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를 꺼내서 해리장애를 찾아 보았다. 해리장애의 범주 아래 D.I.D(다면적 인격장애)가 있었다. 아내는 해리장애에서 아래 속한 세부 가지인 ‘다면적 인격장애’의 약자가 무엇인지 물었고, 나는 ‘해리장애’라는 큰 가지의 약자가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부부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곰곰히 아내에게 큰 소리 친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물어보기 전에 ‘해리장애’를 읽고 있었고, 아내가 ‘해리장애’가 영어로 무엇이냐고 물어서 나는 즉석에서 대답을 해주었다. 아내는 약자(D.I.D)가 세 단어인데 나는 두 단어로 대답해주니, 아내는 미심쩍은 듯 다시 D.I.D의 약자가 무엇인지 내게 다시 물었다. 서로 묻고 답하는 말들을 분석하던 중에 내가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아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내는 세 단어를 두 단어로 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물었는데, 나는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내가 묻는다고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오해가 나를 화나게 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다. 야곱이 얍복강 건너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에서의 태도가 달라졌다.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야곱과 입을 맞추고 서로 울었다(창33: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에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밤에 도데체 무슨 일을 경험하였기에 에서가 180도로 달라졌을까? 에서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야곱이 바뀌었기 때문에 에서의 태도가 바뀌었다.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야곱은 ‘자아(self)’를 내려 놓게 되었다. ‘자아(self)’를 내려 놓게 된 야곱은 진정으로 에서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겼다.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야곱을 바라본 에서는 그의 마음에 쌓였던 분한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에서의 겉을 둘렀던 단단한 ‘화’가 눈처럼 녹아 흐르니, ‘화’ 속에 숨어 있던 부드러운 ‘사랑’이 에서에게 나타났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겉에 있는 단단한 껍질을 벗길 때 주변은 변화된다.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주변 사람들과 환경이 변화한다.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부드러운 것이 나타난다.

우리가 화로 차있으면, 우리 주변에 화가 난 사람들만 모인다. 그러나 우리가 단단한 껍질을 벗겨 은혜 속에 차 있으면, 우리 주변에 은혜가 넘친다.

머리와 가슴의 씨름

머리와 가슴의 씨름
창세기32장 13절~32절

창세기 32절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생명의 위협 앞에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야곱은 첫째, 둘째, 셋째로 그 떼를 나누었다. 첫째 떼가 무사히 건너가면, 두 번째 떼를 보냈고, 두 번째 떼가 무사히 건너가면 세 번째 떼를 보냈다. 화해를 표현하는 예물이었다. 야곱이 보낸 예물은 580마리에 이르는 염소, 양, 소 및 나귀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물질적인 면에서 얼마나 축복하였는지 알 수 있다.

야곱의 소유와 가족들도 얍복나루를 건너 보냈다.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혼자 있었다. 사람들은 무리에 속하려고 한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 있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들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두려움이다. 야곱이 지금까지 겪었던 두려움은 혼자되는 두려움이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떠날 때에도 혼자되는 두려움이었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 땅에 들어갈 때에도 혼자 있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겪는 야곱의 두려움은 혼자 있는 두려움과 함께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이었다.

백척간두의 위험에 있는 야곱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야곱이 그 누군가와 함께 씨름을 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는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이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어긋났더라(창32:25-26).”

야곱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누군와 함께 씨름한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보다 육체적인 보호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씨름으로 야곱의 관심이 자신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씨름으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니 눈 앞에 에서는 야곱을 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 올 때 우리의 생명을 지키게 된다.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느냐, 아니면 머리에 남느냐에 대한 씨름이 우리의 씨름이다.

치려는 자, 돕는 자

치려는 자, 돕는 자
창세기 32장 1절~12절

창세기 32장 11절~12절, “11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말씀에 순종하여 인생을 항해할 때 순풍만 만나면 얼마나 좋으랴? 말씀에 따라 살면 순풍이 따라서 불어야 하는데 역풍이 불 때가 있다. 말씀에 따라 살면 일이 잘풀려야 하는데 오히려 일이 엉겨서 안될 때가 있다.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때로는 원망하기도 한다. 때로는 불의한 자가 세상에서 성공하여 큰 소리 치는 모습을 보면 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떠나기도 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가보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에서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서가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려고 기다리지 않고, 야곱과 그의 식구를 치려고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서가 야곱을 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에서가 사 백명의 군사와 함께 야곱을 기다린다는 말로 알 수 있다(창32:6).

에서가 기쁜 마음으로 야곱을 기다리고 있다면, 사 백명의 군대와 함께 야곱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에서가 사 백명과 함께 야곱을 기다린 이유는 야곱에게 에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에서가 야곱에게 자신의 힘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에서는 힘으로 야곱과 그의 식구를 치기 위함이었다. 야곱도 이러한 에서의 속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창32:11).”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치려는 자를 만나기도 한다. 치려는 자는 우리가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자이다. 우리가 치려는 자를 기도로 맞이하면 치려는 자가 돕는 자로 바뀌게 된다.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역풍을 만날 때는 그 역풍은 우리를 치려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크고 담대하게 키우려는 돕는 바람이다.

주의 거울 앞에

주의 거울 앞에
창세기 31장 43절~55절

창세기 31장 49절,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명품 매장에서 명품 물건이 없어져서 매장 직원이 도난 신고를 하였다. 수사를 해 보니 배달사고 였다. 4개의 박스가 배달이 되어야 할 집에 5개의 박스가 배달이 되었다. 5개의 박스가 배달이 된 집에서 자신이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다. 잘못 배달된 집의 주인이 도둑으로 몰리게 되자, 매장직원에게 화를 내고 항의를 하였다. 항의를 한 분은 ‘목사’였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예전에는 큰 교회 목사들이 작은 교회 목사들을 돌보고, 세워 주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않고, 힘들고 고생하는 다른 후배 목사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후배 목사들은 큰 교회 목사들을 ‘참 목자’로 따르고 배웠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큰 교회 목사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고, 그 분들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세우자고 하였다. 언약의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야곱은 라반의 딸들을 괴롭히지 말 것, 야곱은 라반의 딸들외에 다른 아내를 취하지 말 것, 야곱이 강성해져도 라반에게 보복을 하지 말 것이 언약의 주된 내용이었다.

라반과 야곱이 세운 언약이 깨어진다면 그 모든 책임은 야곱과 야곱의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고 라반은 말했다. “야곱 조상의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 사이를 판단하라(창3153).” 이 말은 라반의 하나님은 라반을 감시할 필요가 없지만,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을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라반과 야곱 사이의 언약이 깨어진다면, 그 책임은 야곱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이를 ‘적반하장’이라고 말하던가? ‘적반하장’은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잘못이 없는 사람을 나무란다는 뜻이다. 라반이 야곱과 언약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반이 아무 죄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함이요, 또한 라반이 가지고 있는 죄의 수치심을 야곱에게 넘기기 위함이었다.

라반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반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라반의 죄된 인생 전부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라반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라반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속임수로 살아온 라반의 인생이 라반을 속이고, 속임수가 라반을 ‘참 인생’이 아닌 ‘거짓 인생’으로 살도록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오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매일 살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을 매일 살피지 않으면, 라반이 살던 인생을 쫓아가게 된다. 내면의 살핌은 주님의 거울 앞에서 우리의 거짓을 벗어버림을 말한다.

선악의 다툼

선악의 다툼
창세기 31장 17절~42절

창세기 31장 42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영성신학 강의를 어제 시작하였다. 수업을 들으시는 한 권사님께서 법원에 가서, 재판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머리가 깨지듯이 아팠다고 했다. 아픔을 경험한 권사님께서 법원에는 갈 곳이 못된다고 말했다. 권사님은 자신의 머리가 아픈 이유가 재판장에 있는 분열, 시기, 속임, 욕심의 악한 영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곱은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곱은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떠났다. 라반은 야곱이 떠난 사실을 야곱이 떠난 삼일 후에 알았다. 야곱이 떠난 사실을 안 라반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야곱을 쫓았다. 라반은 칠 일을 달려 야곱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라반이 300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단 7일 만에 갔다(야곱이 하루에 30마일씩 10일을 갔다고 가정하면). 라반이 급한 마음으로 야곱을 쫓았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이 야곱에게 도착한 그 밤에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창31:24).”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에게 선악을 말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라반이 야곱을 쫓는 목적이 야곱이 돌아오도록 설득하거나, 야곱이 소리 없이 떠난 사실에 대하여 책망할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라반은 야곱을 죽여서 야곱이 가진 모든 재산을 빼앗을 목적을 가졌다. 그 밤에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반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라반에게 분명하게 보이셨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야곱도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함께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간밤에 다시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가 선악을 다투고 싶어도 선악을 다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가리신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정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악을 다투려고 하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신다.

불리함에서 유리함으로

불리함에서 유리함으로
창세기 31장 1절~16절

창세기 31장 2절~3절, “2절: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점이 있고, 얼룩무늬가 있는 양은 야곱의 것이 되었다. 야곱은 목축을 하면서 양 떼의 유전법칙을 알았을 것이다. 야곱은 경험으로 알게 된 유전법칙을 가지고 양 떼를 불리기 시작하였다. 야곱이 생각한 이상으로 양 떼가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야곱의 양 떼는 엄청나게 수가 늘었지만, 라반의 양 떼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게 늘었다. 야곱은 늘어난 양 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많은 남녀 종을 거느리고 많은 약대와 나귀를 소유하게 되었다(창30:43).

야곱이 많은 수의 양 떼를 소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라반의 양들 가운데 많은 수의 양들이 점이 있고, 얼룩무늬가 있는 양이 되었다. 야곱이 양에 대한 유전지식이 라반이 소유한 아롱진 것과 점이 있는 양들을 점과 얼룩무늬가 있는 양으로 바뀌어 놓았다. 야곱의 유전지식보다 더 빠르게 점과 점과 얼룩무늬가 있는 양이 늘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야곱의 목축이 늘어난 것을 본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을 시기하여 그를 모함하였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창31:1)”고 라반의 아들이 말하고 다녔다. 라반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 야곱을 전처럼 대하지 않았다(창31:2).

처음 야곱과 라반이 계약 당시에는 라반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라반에게 아무리 유리한 계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뒤집으시면 뒤집히게 된다. 라반에게 유리하게 보였던 계약이 오히려 야곱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라반이 아무리 자기의 소유를 지키고, 목축의 수를 늘리려고 하여도 하나님을 막을 수 없었다.

라반은 자기의 목축과 야곱의 목축을 분리하였다. 라반의 목축은 야곱에게 맡기지 않고 라반의 아들들이 맡았다. 또한 야곱의 목축과 라반의 목축을 멀리 떨어트러 놓아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라반은 재산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야곱의 목축의 수는 늘어갔고 상대적으로 라반의 목축의 수는 적어졌다. 이에 라반의 아들들이 몹시 흥분하여 야곱이 라반의 소유를 도둑질해 간다는 터무니 없는 모함을 하였다.

야곱의 목축의 수가 늘었으면 라반의 목축의 수도 늘었다. 야곱의 목축의 수가 라반의 목축의 수보다 더 빨리 늘었다. 라반은 야곱이 가진 목축을 탐내었다. 야곱이 가진 목축들이 다 라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반은 야곱이 가진 목축을 다 빼앗으려고 계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라반의 계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야곱에게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셨다.

오늘 우리에게 놓인 불리함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불리함을 보면 불리함은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가 불리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오늘의 불리함은 작아지고, 작아진 불리함은 내일의 유리함으로 바뀐다.

라반과 함께 있을 때

라반과 함께 있을 때
창세기 30장 25절~43절

창세기 30장 27절, “라만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네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더 목을 조이는 때가 있다. 그 때 사람들은 우울해져서 자신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기도는 하지만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여 기도를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들이 취업을 2~3년 동안 하지 못하면 자신을 비관하기 시작한다. 취업을 하려면 실력이 월등하든지, 적절한 환경이 받쳐주어야 취업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그저 착한 학생으로 살았던 자신을 비관한다. 인생의 늪에서 헤메고 있을 때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는가? 하나님께 돌아 가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다시 시각을 맞추어야 깊은 인생의 골짜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야곱은 14년 동안 라반 밑에서 인생의 골짜기를 경험하였다. 야곱은 인생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는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라반이 야곱을 놓아주지 않았다. 라반이 야곱을 놓아주지 않은 이유는 ‘여호와께서 야곱으로 말미암아 라반에게 복을 주신 줄’을 라반이 알고 있었기 때문었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하여 라반을 복을 주셨고, 야곱은 라반때문에 인생의 골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라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야곱을 14년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를 하였다. 그로 인하여 야곱은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교회에도 라반과 야곱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라반이 복이 있어서가 아니라, 야곱이 복이 있어서 교회가 복을 받고, 라반이 복을 받는다. 그러나 라반은 자신 때문에 교회가 복을 받고,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야곱은 눈물을 흘리게 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골짜기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야곱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야곱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라반이 야곱 때문에 인생의 봄날을 맞이한다.

이러한 때 야곱이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오늘 성경이 라반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라반을 벗어나는지 그 방법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라반과 함께 있다면 라반을 떠나거나 라반을 떠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라반과 함께 하겠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의 골짜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꼴이 된다. 때로는 인생의 골짜기가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 아니라 우리가 우매해서 걸어가는 골짜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