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은혜

두 가지 은혜
창세기7장 1절~12절

창세기7장 11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때 대홍수가 있었다. 969-187-182-(1)=600이다. 혹시 1을 왜 빼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라맥의 나이는 0세부터 시작을 했으므로 년도를 계산할 때는1을 빼주어야 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므두셀라가 죽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끝이 왔다’는 말을 하고 싶다.

홍수가 나던 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 동안 지구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큰 깊음의 샘들’은 지구 땅 아래 물들이 어느 정도 깊이 아래 지구를 두를 정도로 물이 골고루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는 것은 그 동안 지구를 보호하였던 ‘창’이 닫혔다가 열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땅 아래에 물이 어디든지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창으로 지구를 덮었기 때문에 지구 전체가 같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창세기7장 11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창세기 7장 11절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7장은 대홍수가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처럼, 창세기의 대홍수는 사실이기 때문에 문자대로 해석해야만 한다.창세기 ‘대홍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대홍수 속에서도 ‘노아가 받은 은혜로’와 함께 살아나는 ‘모든’ 생물이 있다는 두 가지 가르침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을까? 노아는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창6:8).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을 찾았던 환경적인 이유는 할아버지 므두셀라에게 있다. 가족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보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가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노아가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할아버지 므두셀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노아는 마음 깊이 들었을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10:17).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산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거짓 은혜’ 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으면 ‘세상이 주는 기쁨’을 들으면서 살 것이다.

black porn

한 줄기 소망

한 줄기 소망
창세기6장 9절~22절

창세기6장 11절~12절, “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절: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요즘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절대적인 진리가 없고, 개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것이 진리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경을 믿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성경은 개인이 보기에 합리적인 말씀도 있지만, 말도 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씀이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말씀이나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더니 홍해가 갈라졌다는 말씀 등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말씀들이 성경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이다. 사실은 합리적인 판단이나 비합리적 판단 위에 있는 상위개념이다.

땅이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땅과 함께 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땅이 부패한 이유가 모든 육체의 행위가 그 땅을 부패시켰다. 우리는 종종 환경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환경이 파괴된 이유가 인간의 행위 때문이다. 이상기온, 지진, 스나미, 이상 저온으로 남극과 북극의 얼음 녹는 이유가 사람들의 행동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행동의 부패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부패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창6:17)”.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는 다 죽인다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육체가 죽는 가운데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 있다. 노아의 가족이었다.

노아의 가족이 심판에서 건지움을 받은 이유는 노아 때문이었다.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창6:8)에 노아의 가족은 죽음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이 심판을 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한글 번역은 은혜를 찾은 노아가 주어인지 은혜를 주신 여호와가 주어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King James 번역본은 노아가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But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 즉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이유는 노아가 주님 안에서 은혜를 찾았기 때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구원된 성도가 은혜 속에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찾는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분은 영적 부흥은 대환란을 예비하기 위한 영적 부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부흥은 어두운 세상 속에 빛을 비추는 한 줄기 소망의 은혜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영적 부흥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한가닥 소망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다면 그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때이고, 그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은혜를 소망하는 때이다.

youjizz

두 가지 욕구

두 가지 욕구
창세기 6장 1절~8절

창세기 6장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 중에 많이 나오는 말이 ‘성격 차’이 때문에 헤어졌다고 말한다. ‘성격차이’라는 이유를 쫓아가면, 그들이 말한 ‘성격차이’이란 처음 만났을 때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끌려서 결혼까지 이르게 한 ‘매력 포인트’였다. 서로 달라서 결혼까지 했는데, 결혼하여 함께 살다 보니 ‘다름의 매력’이 ‘성격차이’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이다. 노아 홍수 전의 세상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홍수심판의 시작이 된 사건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모두’를 아내로 삼은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홍수심판의 시작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사람 ‘모두’를 아내로 삼은 것이 홍수심판에 이르게 한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스콜필드 주석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유6)’이라고 말한다. 하늘을 떠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자기가 원하는 여자 모두와 결혼하였다. 그들과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 중에 ‘네피림’이 있었는데, ‘네피림’은 ‘옛날의 용사’이다. 스콜필드의 해석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이유는 ‘천사’는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을 떠난 천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자손들이라고 해석한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홍수심판의 원인이다. 홍수심판의 원인이 사람이 자기 욕심대로 살다 보니 하나님을 온전히 잊었기 때문이었다. 홍수심판과 같은 심판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삶의 목적이 온전히 ‘자기 욕심’만을 채우는 것이 될 때, ‘불’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창6:6)”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기 욕심만이 아닌 하나님을 경험한 노아는 죄악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메스로는 ‘욕구 단계설’을 주장하였는데, 그가 말한 인간의 욕구의 단계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로 욕구의 단계를 나누고 있다. 나중에 메슬로는 가장 윗 단계 욕구로 ‘자기 실현의 욕구’ 위에 둔 것이 ‘knowing God’이다. 자기실현의 욕구가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뒤에 감추어져 있다. 자기실현의 욕구가 육체적인 욕구를 채우는 통로가 된다면 세상은 미움과 죄가 계속해서 쌓이게 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인가?

우리의 욕구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움직인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free gay porn

두 가지 의리

두 가지 의리
창세기 5장 18절~32절

창세기 5장 21절~24절,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여 자녀들을 낳았으며, 23절: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배우 김보성이 ‘의리’를 자기의 트랜드로 삼아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의리를 지키면서 산 사람은 누구일까? 창세기에서는 에녹을 들 수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의 ‘의리’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성경은 기록한다. 어떻게 에녹이 하나님께 의리를 지킨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말할 수 있는가? 첫째,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다. 둘째, 신약성경에서 에녹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한다. 히브리서11장 5절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에녹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의리를 지키면서 살 수 있었을까? 어떤 신학자는 에녹의 의리를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찾는다. 므두셀라 이름의 뜻은 “창을 던지는 자”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기도 하지만, 므두셀라의 이름의 다른 뜻은 “그가 죽으면 세상에 끝이 온다”이다. 아들이 죽으면 세상의 끝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던 에녹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의리를 지키면서 살 수 있었다.

에녹이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므두셀라를 낳은 육십 오세부터 하나님에게 의리를 지킬 수 있었다(창5:21-22). 에녹은 나이 육십 오세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에녹의 나이 육십 오세가 될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다.

에녹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에녹의 변화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야렛의 삶에서 배운 겸손때문이었다. 아버지 야렛의 삶이 에녹을 하나님께 돌아가서 의리를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야렛은 손자 므두셀라 다음으로 창세기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기도 하였다.

야렛 이름의 뜻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 자’이다. 아버지 야렛의 겸손이 에녹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에녹이 아버지 야렛의 겸손을 가정에서 배워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었다.

변화는 겸손에서 나온다. 교만한 사람은 변화가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내면을 변화시킨 사람이다. 변화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의리를 지킬 수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리는 ‘사람에 대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의리는 ‘자신의 내면의 변화’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의리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가?

lesbian porn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창세기 5장 1절~17절

창세기 5장 5절,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어떤 학생이 “교수님은 창세기에 900살이 넘게 살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으세요?”하고 물었다. “믿습니다. 창세기에 대하여 믿지 못하면 성경을 믿지 못합니다”라고 그 분께 대답을 하였다. “요즘 백세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이 좋은 것을 먹고, 의료시설이 발달하니 백세까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좋은 것을 먹으면 생명이 연장이 될 것이고, 좋은 장소에서 살면 생명이 더 연장이 될 것이고, 스트레스가 적으면 생명이 더 더욱 연장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태양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다면 연장될 수 있는 생명이 얼마가 될지 모릅니다”라고 오래 살 수 있는 이유를 설명을 하였다.

아담이 구백 삼십세를 살고 죽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아담은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다는 것은 아담의 영이 죽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아담의 육체도 죽었다. 숨을 쉬고, 몸이 움직여서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아담의 육체는 완전히 죽은 것이다. 단지 아담의 몸 안에 있는 세포들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꽃을 꺾어서 화병에 놓아 두면 꽃은 며칠은 산다. 그러나 꺾은 꽃을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고 아담의 육신은 죽었지만 몸 안에 있는 세포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몸 안에 정자는 살아 있지만, 정자가 몸 밖으로 나오면 48~72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몸 밖에 나온 정자가 움직이고 있어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 하였던 여우놀이가 생각난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한다. 멋쟁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반찬”하고 대화를 하고 나서 묻는 질문은 “죽었니? 살았니?”이다. 죽었다고 대답하면 아이들은 가만히 있고, 살았다고 대답하면 아이들은 도망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 죽었니? 살았니?”하고 물으신다. 우리가 죽었으면 예수님께서 계실 수 있는 장소가 있지만, 우리가 살았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는 장소가 없다.

youporn

보이지 않던 상함과 상처

보이지 않던 상처와 상함
창세기 4장 16절~26절

창세기 4장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책이 한국에서 이단 시비가 있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예전의 저주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를 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구원 받은 성도의 가정에 흐르는 저주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절)”. 요한일서의 말씀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 모든 죄를 깨끗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을 받아도 우리가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다면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고 있는 ‘원죄’는 완전히 용서 되었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행한 죄들(자범죄-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후에 행하여진 개개인의 죄들)은 개별적으로 회개하여야 한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고 난 후에 여호와 앞에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였다. 가인은 에녹성을 쌓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가인의 자손들은 점점 하나님과 담을 쌓더니,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니, 가인의 자손인 라멕도 사람을 죽였다. 가인이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더니 가인의 후손이 가인과 같은 죄를 범하였다. 또한 가인이 죄를 회개하지 않았더니, 가인의 자손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귀하게 여겼다.

부모는 자녀들의 모델이다. 부모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자녀가 공부를 잘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뛰어난 자녀를 주셔서 공부를 잘하는 자녀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자녀들은 부모를 닮는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으면서 부모 자신도 모르는 부모의 죄를 배우게 된다. 부모도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의 부모에게 배운 것이다. 예수님 앞에 해결하지 못한 부모의 죄들이 양육과 돌봄형태로 나타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수록 자녀는 부모의 죄를 자녀도 모르게 배우게 된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살인을 하였던 라멕은 “나의 상처 때문에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 때문에 소년을 죽였다(창4:23)”라고 고백한다. 라멕이 가졌던 상처는 무엇인가? 가인이 아무리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양육하였어도, 회개하지 않고 남은 죄가 가인의 상처가 되었고, 가인의 상처가 자녀들의 마음에 그대로 새겨졌다. 가인의 수치심과 두려움의 상처가 라멕의 마음에 상처로 새겨졌다. 라멕이 가졌던 상함은 무엇인가? 부모의 죄로 인하여 행한 잘못된 양육이 라멕의 상함이 되었다. 상함은 부모의 양육에서 받은 아픔이다. 상함은 부모 탓만 할 수 없는데, 부모도 그 부모의 잘못된 양육으로 상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보이지 않던 상함과 상처를 들어내어야 한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행하던 가족의 습관이나 규칙을 말씀 앞에 조명하여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함과 상처는 우리의 행동과 습관이 되어 우리를 괴롭힐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사랑하는 상대를 괴롭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상처와 상함을 찾아 주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로 물들어 보이지 않던 상함과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 죄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상함을 남기고, 상처와 상함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깨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한다.

anime porn

말과 침묵

말과 침묵
창세기 4장 1절~15절

창세기4장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10월 27일 갑작스러운 신해철(47세)의 죽음이 그의 팬들은 놀랐다. 동료 가수들은 신해철의 죽음이 의료사고라고 주장을 했다. 그들은 신해철의 장례식을 중단하고 신해철의 시신을 부검해 달라고 의뢰하였다.시신의 부검은 특별한 사인이 없는 한 하지 않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신해철의 시신을 부검하였다. 동료 가수들은 신해철에 대한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지만, 신해철을 수술한 S병원에 대하여 울분을 터트렸다.

사람의 감정은 상대적이다. 화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되지만, 상대를 위협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기쁨은 자신의 기대가 만족되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기쁨으로 인하여 상대는 상대적인 결핍을 경험하기도 한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이다. 가인은 농사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에게는 기쁨이지만 가인에게는 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자 가인은 몹시 화가 났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화를 보고, 가인에게 “너의 분을 다스리라, 네가 너의 분을 다스리지 못하면, 죄가 너를 다스리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인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였다. 가인은 분을 표현하였더니 더 큰 화가 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육신적인 반응이다. 사람은 육신적인 반응에 따라 산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적인 반응을 자기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 만약 육신의 반응을 통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육신이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즉 겉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속은 동물의 모습을 하게 된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는 도망자가 되게 하셨다. 도망자가 된 가인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 말하였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은혜를 주신다.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할 것이고,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칠 배나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가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말하였더니 은혜를 받았다.

가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혜를 받을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처지를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태가 은혜의 조건이 아니고, 은혜의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상태를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자는 은혜를 받을 것이고, 침묵한다면 은혜를 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anime porn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창세기3장 14절~21절

창세기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듣는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 사역을 하시는 어떤 분에게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 갔는지 혹은 지옥에 갔는지 물었더니 창세기 3장 15절 약속을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주었으니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죽게’ 되었다. 죽게 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에덴 동산에 살지도 못하였다. 여자에게는 자녀를 낳는 고통이 크게 더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자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고, 남자는 평생 수고하여야 땅의 소상을 먹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말씀하셨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고, 땀을 흘려야 했다.

인생의 모든 비극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이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고통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 사람은 수고와 고통이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을 짓궂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고, 선악과를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선악과의 근원(죄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악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사람은 교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격적인 교제는 신뢰를 바탕으로 시작이 되고, 신뢰는 상대를 지켜줌으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제를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서로 상대를 신뢰하여야 교제할 수 있다. 신뢰는 어떻게 생기는가? 상대가 한 말을 지켜줄 때 신뢰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제할 수 있는 길이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여 놓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서로 원수가 되고,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과 미래의 교제를 꿈꾸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현재의 교제가 아니라 미래의 교제를 바라는 믿음(신뢰)이 아담과 하와가 죽음 속에서도 살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과 미래에 교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아담이 그의 아내를 하와라고 불렀다(창3:20). ‘하와’라는 뜻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앞으로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될 것이라는 알았기 때문에 아내의 이름을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도 삶과 죽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어떠한 환경과 고통 속에서도 생명의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다.

xvide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