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생명수

넘치는 생명수
요한복음 7장 37절~44절

요한복음7장 37절~38절,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의 성 추행 사건으로 한국 검사들의 단면을 알 수 있었다.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김수창 전 검사장은 기자회견을 열면서 자기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리고 사건을 맡은 검사까지도 그가 한 거짓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성 추행 모습이 CCTV에 선명하게 나타나서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몇 차례 바바리맨으로 여자 고등학교 앞에서 신체의 일부를 들어냈다는 것도 밝혀졌다.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자 김수창 전검사장은 자신이 성도착 증세가 있고 정신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수치심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착각하면서 살고,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는 가면을 쓰고 산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죄 된 모습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은 죽음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예수님이 비춰주는 거울이 우리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을 덮어준다. 두려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외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예수님이 주신 생명수를 마시면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덮히고, 기쁨과 평강과 죄에 대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에게 다가 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대신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고, 그들의 두려움과 외로움, 수치심이 덮는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생명수가 넘치리라.”

배에 생명수가 넘치는 사람은 수치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자존감이 세워지게 된다. 생명수가 넘치는 사람은 병든 자존감을 치유되고, 병든 정서와 감정이 회복되어,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믿는 사람은 “나는 믿는데 그러한 회복과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이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하는 믿음이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현실넘어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할 때에도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하고 예수님이 생명되심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현실을 바라볼 때 그들에게 생명수는 흐르지 않았다.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생명수가 넘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과 철학을 믿는 믿음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가 생명수가 넘치지 못하게 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는 세상의 말과 철학을 믿는다. 인간의 철학과 이성이 가득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흐르지 못한다. 성경은 생명수가 “배”에 흐른다고 말씀하신다. 배에 생명수가 넘치게 하려면 배에 있는 세상의 생각과 철학과 이성을 배에서 흘려보내고, 말씀으로 배를 비워야 한다. 배에 있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이성을 배에서 흘려보내고, 말씀으로 배를 비울 때 생명수가 넘쳐 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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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지식, 열린 지식

닫힌 지식 열린 지식
요한복음 7장 25절~36절

요한복음 7장 33절~34절, “3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절: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하리라 하시니.”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14일에 한국을 방한하였다가 오늘(18일) 로마로 떠난다. 교황의 방한 기간 중에 광화문 일대 교통이 종종 통제 되었다. 교황은 가난한 자를 살피는 자신의 이미지에 맞추어서 검소하게 작은 차(기아 Soul)를 타고,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고, 대대적인 환영행사 보다는 간소하게 의전행사를 치루었다.

낮은 사람과 같이하고자 하는 교황은 정의를 강조하였다. 교황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말하였다. 정의란 과거의 불의를 잊지 않지만 용서하는 관용, 협력을 통하여 불의를 극복하는 힘,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를 토대로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워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태도, 현재의 장애를 극복하는 힘, 가난한 사람과 함께 비전을 이루려는 의지가 정의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은 과거의 불의를 용서하고, 현재의 장애를 넘어서, 행복한 미래를 이루어야 하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메세지로 들렸다. 희망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메세지었다. 그러나 교황의 메세지는 일방적인 메세지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메세지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들었던 메세지를 전달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쌍방으로 메세지를 전달하신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 “나는 너희들과 조금 더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너희들이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또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들은 오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전달하는 말씀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앞으로 할 말을 동시에 전달하셨다.

예수님의 말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말은 닫힌 말이고, 쌍방으로 교환되는 말은 열린 말이다. 쌍방으로 전달되는 말을 열린 대화라고 말하고, 일방으로 전달되는 말을 닫힌 대화라고 말한다.

지식에도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열린 지식과 닫힌 지식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닫힌 지식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인 것 같지만 사람의 지식이었다. 사람의 지식은 닫힌 지식이다. 닫힌 지식은 한 번 받아들이면 그 지식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의 태도를 고정시키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지식 같지만 사람의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열린 지식이다. 열린 지식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더 적합하고, 더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지식이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열린 지식은 사람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성장하게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닫힌 지식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들지만, 열린 지식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 놓는다. 닫힌 지식은 사람의 의를 나타내지만, 열린 지식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나는 어떤 지식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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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 다른 열매

같은 일 다른 열매
요한복음 7장 10절~24절

요한복음 7장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일본 아베 수상은 처음부터 강경책을 주장한 정치인이다. 아베 수상은 이로 인하여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본이 어려운 처지에 이르자 다시 인기를 얻어 일본 수상이 되었다. 특히 아베 수상의 역사 왜곡으로 인하여 한일관계가 나빠지고 있다. 일본 중심의 문화를 형성하려면 과거의 일본이 최고였다라는 신념을 역사 속에서 증거해야 한다. 일본이 역사 왜곡은 이러한 아베 수상의 신념에 동조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는 숨은 이유는 일본이 겪는 현재의 위기 때문이다. 일본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점점 살 수 없는 나라로 되고 있다. 일본은 영토를 확장시키지 않으면 일본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군대를 일으키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강경책’이다.

과거에도 일본은 살기 위하여 한국에게 ‘강경책’을 취하였다.일본은 조선(한국)과 전쟁을 하였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일본 내의 분쟁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과 전쟁을 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일본에서 줄어드는 생필품을 늘이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조선은 일본과의 교역의 양을 제한하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교역의 양을 제한한다는 말은 일본에서 지도층이 필요한 물건이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한 이유는 일본의 지도층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일본이 취하였던 ‘강경책’은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예수님께서 한 가지 일만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행하였던 한 가지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유대인을 살리는 일이었다. 유대인을 살리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셨다. 그러나 유대인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을 하신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으로 심판하려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에게 “안식일에 사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들은 ‘할례’를 하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한 나의 일에 대하여 왜 화를 내느냐?”하고 말씀하셨다(요7:23). 그리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요7:24). 예수님이나 유대인이 한 가지 일을 하였는데 예수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유대인의 일은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행하는 많은 일이 있지만 일의 종류는 두 가지이지만 행하는 일은 한 가지 일이다. ‘나를 위한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일’이냐 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일 같지만 나를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일이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일 같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내가 잘사는 일 같지만 그 또한 하나님을 위한 일이 있다. ‘하나님 일’이냐 ‘나를 위한 일’이냐는 밖으로 보여진 일로 구분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로 구분된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면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일’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나’를 항하고 있으면 어떠한 일을 하여도 ‘나를 위한 일’이 된다. 그러나 같은 일 같이 보여도 일의 열매는 다르다. ‘하나님을 위한 한 가지 일’이 나의 영혼을 살찌우고 또한 나의 육신도 평안하게 한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일’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되어 끝없이 나를 괴롭게 하고, 결국은 나를 죽인다.

여러분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를 위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겉으로는 다 ‘같은 일’ 같이 보이지만, 삶의 열매(결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열매를 맺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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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로 가면

예수께로 가면

어머님 친구 분 외손녀가 4년 동안 백혈병을 앓다가 8월 4일에 하늘 나라로 갔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백혈병이 거의 완치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건강했는데
올해 들어서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주치의는 부모에게 강한 치료를 할 것인지 서서히 치료를 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고,
부모는 서서히 치료하기를 원했다.
소녀는 서서히 치료되지 않고 갑자기 천국으로 갔다.
11세부터 백혈병을 앓고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간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지만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딸을 잃은 슬픔, 손녀를 잃은 슬픔이 잔잔하게 몰려왔다.
소녀는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담당 의사에게 빨리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의사는 소녀에게 주는 약을 끊었더니,
소녀는 자기가 소원하던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소녀의 장례식은 참여한 사람에게는 많은 은혜를 주었다.
가족 모두가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어서 간증이었다.
이모부부는 천안에 있는 대학교 교수인데 방학 중이었고
사촌오빠는 군대에 가 있는데 5일 간의 휴가기간 중 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선교 가기 전에 조카와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부모에게는 나 같이 아파서 천국에 오지 말라고
나 같이 아프다 천국에 오면 부모를 힘들게 맞이해야 하니
건강하게 살다가 천국에 오라는 말을 남겼다.
소녀의 밝은 얼굴에 가족 모두 감동을 받았다.

소녀가 자신의 장례식 곡으로 “예수께로 가면”을 선택하였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장례식 곡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가사였지만
소녀가 가는 길에 맞는 곡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예수께로 가면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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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

인생역전
요한복음 7장 1절 ~9절

요한복음 7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상처 중에 하나는 거절감이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를 당하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래 남는다. 마음의 상처는 마음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험난하게 만든다.

‘내적 치유’로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여 마음의 고통도 사라지게 하고 인생도 바꾸고자 한다. ‘내적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 상처를 들어내어야 한다. 마음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숨긴다면 상처는 치유 할 수 없고, 상처는 더 악화된다. 말씀 앞에 마음을 열면 말씀이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치유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여기서 유대인은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을 말함)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러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은 치유하지 못하고 갈릴리인들만 치유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갈릴리인은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았는데 치유 받은 이유는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환영’과 거절이다. 환영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고 상처가 더 커졌다. 커진 상처는 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이 ‘양반’이라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유대인은 ‘상놈’이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자 치유 받은 갈릴리 사람과 치유 받지 못한 유대인의 위치가 바뀌었다. 영적으로 갈릴리 사람이 ‘양반’이 되고, 유대인들이 ‘상놈’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상놈’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 앞에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환영을 환영하지 않고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 앞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가 들어나자 예수님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미워하였다.

상처가 예수님 앞에 들어나면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된다. 한 반응은 상처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조용히 나가 상처를 치유 받으려는 마음이고 다른 반응은 상처를 건드리니 아픈 상처가 더 곪아 미쳐 날뛰는 반응이다.

말씀이 들어가면 두 가지 반응을 한다. 한 반응은 “내 죄를 어찌할꼬”하고 통곡하고 회개하는 반응과 또 다른 반응은 “내가 죄인이 아닌데 나를 죄인이라고 해”하고 말씀 앞에 강하게 상처를 부인하는 반응이다. 말씀 앞에 반응에 따라 사람의 지위(status)를 바꾸어 놓는다. 한마디로 말씀 앞에 인생역전이 있다.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한 갈릴리인들과 예수님 앞에 교만해져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의 지위가 바뀌어졌다.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던 갈릴리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약속의 자녀였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멀어졌다.

말씀 앞에 인생역전이 있다.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들어낼 때 죄의 수치감은 사라지고, 나약함은 나의 강함이 된다. 말씀 앞에 치유를 받으면 인생역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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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퍼즐

말씀의 퍼즐
요한복음 6장 52절~65절

요한복음6장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만 잘하면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도 잘 해결 할 수 있다는 한국의 속담이다. 말하는 기술에 따라서 험한 산길을 가기도 하고 평탄한 길을 가기도 한다.

유대인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살아 있는 떡이고 이 떡을 먹어야 산다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다;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사람이 자기의 살을 주어 사람에게 먹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역사나 경험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말씀은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영으로 먹는 사람이 산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세계에 몸을 담그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영으로 나의 피와 살을 먹으라”하고 말씀하셨으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보다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시고, 또 예수님은 기술적으로 말씀하셔서 말이 마음에 와 닿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말이 잘 전달되고, 말의 기술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말이 잘 전달되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이해하는 인식, 지식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나의 피와 살을 먹으라’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고, 떠난 제자들은 그 이후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6:66).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예수님을 떠나게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들으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셨다.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을 하셔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성경을 읽으면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들이 있다. 말씀이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하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생명을 주는 말씀은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의 이치에 맞는 말은 생명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말은 죽음의 말이지 생명의 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생명의 말씀을 이치에 닿는 말씀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의 말씀을 퍼즐과 같이 맞추어야 한다. 생명의 말씀 퍼즐 한 조각 한 조각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한 조각 한 조각이 전체 그림에 맞는 위치에 놓여질 때 하나님이 그리신 전체 그림의 퍼즐을 바라 보게 되어 이치에 맞는 말씀이 된다. 오늘 전체 그림에 놓아야 할 한 조각 말씀의 퍼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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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

매미 소리

매번 겨울에만 한국에 나갔다가 여름에 흐르는 땀을 느끼게 된 것은 14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 여름의 혹독한 맛보니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매서운 더위 속에서 나를 반기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나무 숲 사이에 우는 매미 소리였다.
매미 소리를 듣자 마자 마음의 평안이 찾아 왔다 .
정겨운 매미 소리…
정겨운 소리도 딱 이틀 뿐이었다.
더위의 종착역인 말복(8월7일)이 지나자 매미 소리는 멈췄고,
새로 태어난 매미들만 이따금씩 작은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내어야 할 때와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매미였다.
모든 자연물은 소리를 낼 때와 소리 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한다.

그러나 소리의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있다.
소리를 낼 때와 소리를 멈출 때를 혼돈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 소리를 지를 때와 하나님께 잠잠 할 때를 혼돈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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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맛

환상적인 맛
요한복음6장 41절~51절

요한복음 6장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문장의 표현을 보면 문장을 쓴 저자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문장은 사실을 묘사하는 글도 있고, 어떤 문장은 비유로 설명하는 글도 있고, 어떤 문장은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이 있다.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면 표현 기교 속에 숨어 있는 저자의 숨은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의도는 글을 쓰는 사람이 표현하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6장은 기록한다. 여기서 사용된 문장의 기교는 무엇인가? 직유법인가 은유법인가 아니면 풍유법인가? 요한복음 6장의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연상하게 하고,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으나, 예수님이 말하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 산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즉 예수님=생명의 떡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생명의 떡이라면 생명의 양식인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방법의 문제가 제기가 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떡을 직접 먹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하였던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피와 살을 공공연하게 먹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직접 먹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 주었다고 추측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을 직접 먹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와 피를 어떻게 직접 먹을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대로 선포하고,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 앞에 놓은 떡과 포도주가 말씀의 능력으로 ‘생명의 떡’이 됨을 믿어야 한다. 떡과 포도주 앞에 말씀을 선포할 때 예수님이신 생명의 떡이 된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이 된다.

예수님이신 말씀에 생명이 있다. 오늘 먹을 생명의 떡은 무엇인가?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깊이 묵상하고 먹을 때 예수님이신 생명의 떡을 먹게 된다. ‘생명의 떡’에는 먹은 자만이 알 수 있는 ‘환상적인 맛’이 있다.

마음의 표적

마음의 표적
요한복음6장 21절~40절

요한복음6장 29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시간이 없어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특별한 재능, 자질, 은사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헌신에 대한 순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을 맡기기도 한다.

하나님의 일은 많은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믿는’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표적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없는 사람이 있다. 군중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찾으려 하지 않고, 떡을 먹으려고 하였다(요6:26).

한국에서 교회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높다. 특히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 회복의 소리이다. 이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복을 따로 보았던 한국인의 무속신앙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과 복을 따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과 복을 따로 구분해서 보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복만 찾게 된다. 가난하였던 한국 교인들에게 ‘먹을 복’만 강조하였지 ‘먹을 복’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렸기 때문에 복만 찾게 되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을 영광을 가로 채고 있었지는 않았는가하는 자성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표적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예수님을 만나도 예수님의 표적이 있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가 있다.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도 한 무리는예수님에게서 ‘떡’을 찾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에게서 ‘떡’을 찾고 ‘떡’을 주시는 예수님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한 무리는 예수님의 표적이 있고 다른 한 무리에는 예수님의 표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초점을 두었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물고기와 떡’에 초점을 두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 한 무리는 ‘떡’을 먹고, ‘떡’만 찾았고, 다른 한 무리는 ‘떡’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소원하였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 사업이 번창하게 해달라, 빚을 갚게 해달라, 어려움 속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받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예수님의 표적을 마음에 새길 수 없다. 받은 응답에 감사하여 예수님께 한 발 더 나가야 마음의 교제를 할 수 있다. 마음의 표적은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표적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마음의 표적이 더 뚜렷해진다.

오늘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 일을 찾아 마음의 표적을 더 깊이 새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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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시작

두려움의 시작
요한복음 6장 16절~21절

요한복음 6장 19절,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사업이 망할까봐 두려워한다. 건달들은 두려워서 주먹을 쓴다. 어린 아이는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자기가 원한 것을 이룬 어른은 이룬 것을 잃어 버릴까봐 두려워한다.

두려움의 시작은 죄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시작이 되었다. 창세기3장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어 벗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하는 것도, 어른이 두려워하는 것도 죄 때문이다. 사물을 인식기 시작하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고, 나를 바라보면서 무의식 중에 있는 죄가 두려움을 만든다.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들은 자기를 보호해 주는 엄마가 없을 때 두려움이 생긴다. 죄는 하나님이 없음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못할 때 두려움은 시작이 된다. ‘벌거벗었다’라는 말의 뜻은 죄중에 있는 너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두려움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생물학적인 ‘신호등’이다. 두려움이 없으면 육체를 보호하지 못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과 같이 불에 뛰어 들것인가? 두려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육체는 자기가 보호해야만 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이제 혼자 벌거벗은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암흑 속에 혼자 있는 두려움아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감옥에서 가장 큰 형벌은 빛이 들지 않는 곳에 혼자 감금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어둠이고 또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혼자 있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혼자였다. 혼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요한복음 6장 17절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시작은 육체를 지키기 위하여 어둠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사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바다 안에서 어두워서 두려워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두려움의 시작은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시작이 되었다. 자신을 보호할 분이 없고, 자신을 보호할 분이 계시지 않으니 어디로 갈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의 시작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시작이 된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내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물어보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아는 방법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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