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화평

세상에서 화평
마태복음 10장 34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구원’이란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 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나라를 대신해서 구해주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죄, 죽음 그리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믿는 이들을 구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영적 전쟁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화평을 주러 오셨는데 이 화평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을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히 안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마귀와의 전쟁에 이겨야 우리가 그 화평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한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목사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

목사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
골로새서 1장 24절~29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바울은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권하다’의 다른 표현은 ‘경고하다’의 뜻이다. ‘지혜’는 ‘성경을 세상에 적용하는 능력 따라 살게 하는 말씀을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르게 말하면, 성도는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성도는 세상의 유혹에 따라 살지 않고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각 사람을 가르치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고, 그리스도께 드리고자 함이다.

목사는 성도를 가르치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에 따르는 힘이 있는 목사가 성도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목사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함이다. 목사를 따르는 사람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를 세우기 위함이다. 목사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다른 교인을 섬기는 이유는 다른 교인을 완전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
골로새서 1장 24절~29절

Dr. Henry Cloud는 사람들이 자살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둘째, 내 잘못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셋째, 이러한 고통은 영원히 끝날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는 좌절해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살을 택하게 된다.

오늘 골로새서 1장 28절에 ‘영광의 소망’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영광의 소망이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골1:25), 둘째, 성도에게 나타난 비밀, 셋째, 풍성함이 무엇인지 성도에게 알게 함, 넷째, 영광의 소망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소망’이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우리가 풍성해지고, 우리를 통한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나타나 하늘에 이르는 영광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려면 골로새서1장 20절의 말씀이 체화(體化)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처럼, 말씀이 우리 육신 안에 거하여야 한다. 소가 여물을 씹고 또 씹어 넘기듯이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억하고, 행하는 일이 반복되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육신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뜻은 말씀이 우리 안에 성육신되었다는 뜻이다.

섬김의 의미

섬김의 의미
마태복음 20장 28절

현대 교회 안에서 많이 들리는 소리 중에 하나가 ‘섬김’이다. 영적인 권위적인 목사에서 섬기는 목사, 영적인 능력보다 섬기는 교인들을 현대교회에서 요구한다. 섬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20장 27절과 28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섬김의 뜻은 섬김=종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최연(홍익대학교)교수는 섬김을 ‘자기 희생적 리더십’라고 표현했고, 자기희생을 하면 카리스마, 즉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얻을 수 있고, 정통성을 확보하며, 섬기을 받는 사람이 섬김의 빚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된다고 말했다. 동시에 섬김을 통하여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조직은 쇠퇴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섬김을 조직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조직은 발전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희생만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가 섬김에 대한 의미를 재정의하게 한다. 교회가 사랑으로 성장하지 않고 섬김을 강요한다면 그 섬김은 의미없는 한 사람의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처하여 있는 교회 문화에 맞도록 섬김의 의미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교회 상황에서 섬김은 무엇인가? 아마도 각자 처해 있는 교회의 상황에 따라 섬김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중심적인 의미는 섬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 만약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섬김을 받는데 머물러 있다면, 그 섬김은 사람을 죽이는 섬김일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골로새서 1장 19절~23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다는 말이 있다. 이를 한자성어로 거자일소(去者日疎)라고 하며 ‘사람은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는 뜻이다. 골로새서 1장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들”이라고 예전에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악한 행실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여기서 마음이란 생각을 말한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악한 행실로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악한 행실로 인하여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골1:20). 그리스도 안에 화평을 이룬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이 우리의 행실을 바꾸어야 한다. 즉 우리의 믿음이 행위로 표현되어야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먼저 나신 이

먼저 나신 이
골로새서 1장 15절~18절

오늘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다. 15절에 주의 깊게 읽을 부분이 있는데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이다. ‘먼저 나신 이’를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창조된 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나신 이’는 King James Version에 ‘firstbone of every creature’라고 말하고 있으며 , 먼저 나신 이의 뜻을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설명하고 있다; “이는 그 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계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창조 때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뜻은 창조 하실 때 계신 분이라는 뜻이며, 모든 창조를 시작 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누구 안에 있는가?

누구 안에 있는가?
골로새서 1장 12절~14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유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유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흑암의 권세에서 예수님께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구하셔서 그 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었기 때문이다(골1:12-13).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다. 여기서 죄사함이란 ‘Redemption’을 말하며, 이를 번역하면 ‘구속’을 의미한다. 구속이란 원래 상업적인 용어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죄의 종이 된 우리를 예수님께서 보혈로 그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음을 의미한다(엡1:7; 고전1:30; 골1:14; 히9:15).

우리가 죄사함을 얻게 되면 마귀에서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마귀에게 자유로운가? 우리는 죄에 유혹을 받고, 죄를 짓고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성경은 우리가 마귀로부터 자유롭다고 선포하는데 우리 환경을 보면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이 느낄 때가 많다. 우리가 이렇게 연약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보이신 부활을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골로새서 1장 1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아들 안에’ 우리가 속량함을 입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골1:14).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어둠의 권능을 이기고 그 분의 왕국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누구 안에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보면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것

가장 먼저 구하여야 하는 것
골로새서 1장 9절~12절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첫째, 모든 지혜와 영적 깨달음에서 그 분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고, 둘째, 주께 합당하게 걸어서 모든 일에 그분을 기쁘게 하고, 셋째,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넷째, 하나님 아는 것에서 자라고, 다섯째, 그 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되며, 여섯째,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고, 일곱째,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상속 유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구하여야 할까? 지혜와 영적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가 있어야 말씀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서 살 수 있다. 영적 깨달음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하면서 살게 된다. 요즘은 가짜가 진짜같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면 특히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
골로새서 1장 3절~8절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 믿음은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고, 이 소망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다. 너희의 믿음은 에바브라에게 배웠다. 성령 안에서 너희 믿음을 나타내게 되었다.”

오늘 말씀은 믿음 안에는 소망, 배움과 성령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러나 마귀는 환경을 통하여 믿음 안에 있어야 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빼앗으려 한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소망을 잃게 된다. 교만해지면 배우려 하지 않는다.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없다. 믿음 속에 있어야 할 세 가지를 지키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감각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해야 한다(히5:14).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살면 믿음 안에 세 가지를 잃게 되며,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믿음 안에 세 가지를 지키게 된다.

결국 믿음은 세 가지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소망만 있는 믿음, 배움만 있는 믿음, 성령 안에 믿음이 있을 수 있다. 소망, 배움, 성령 안에 믿음이 산믿음이 된다.

함께 할 때 받는 은혜

골로새서 1장 1절~2절
함께 할 때 받는 은혜

오늘부터 웹사이트를 통하여 짬짬이 시간이 날 때 말씀 묵상을 올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하여 골로새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1장 1절에서 2절에서 바울은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인사를 할 때 “바울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인사의 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함께 일을 할 때 그 가운데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한다는 뜻은 가족과 같이, 형제자매와 같이, 부모자녀와 같은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함께 일할 때 주님에게 받는 은혜가 있는데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와 평강의 은혜를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우리 자녀들이 ‘은혜와 평강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끈에 매여 우리가 함께 할 때 우리의 가족, 혹은 우리의 자녀들이 은혜와 평강 속에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