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

매미 소리

매번 겨울에만 한국에 나갔다가 여름에 흐르는 땀을 느끼게 된 것은 14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 여름의 혹독한 맛보니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매서운 더위 속에서 나를 반기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나무 숲 사이에 우는 매미 소리였다.
매미 소리를 듣자 마자 마음의 평안이 찾아 왔다 .
정겨운 매미 소리…
정겨운 소리도 딱 이틀 뿐이었다.
더위의 종착역인 말복(8월7일)이 지나자 매미 소리는 멈췄고,
새로 태어난 매미들만 이따금씩 작은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내어야 할 때와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매미였다.
모든 자연물은 소리를 낼 때와 소리 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한다.

그러나 소리의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있다.
소리를 낼 때와 소리를 멈출 때를 혼돈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 소리를 지를 때와 하나님께 잠잠 할 때를 혼돈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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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맛

환상적인 맛
요한복음6장 41절~51절

요한복음 6장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문장의 표현을 보면 문장을 쓴 저자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문장은 사실을 묘사하는 글도 있고, 어떤 문장은 비유로 설명하는 글도 있고, 어떤 문장은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글이 있다.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면 표현 기교 속에 숨어 있는 저자의 숨은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의도는 글을 쓰는 사람이 표현하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6장은 기록한다. 여기서 사용된 문장의 기교는 무엇인가? 직유법인가 은유법인가 아니면 풍유법인가? 요한복음 6장의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연상하게 하고,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으나, 예수님이 말하는 생명의 떡을 먹으면 산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즉 예수님=생명의 떡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생명의 떡이라면 생명의 양식인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방법의 문제가 제기가 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떡을 직접 먹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하였던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피와 살을 공공연하게 먹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직접 먹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 주었다고 추측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을 직접 먹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와 피를 어떻게 직접 먹을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대로 선포하고,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 앞에 놓은 떡과 포도주가 말씀의 능력으로 ‘생명의 떡’이 됨을 믿어야 한다. 떡과 포도주 앞에 말씀을 선포할 때 예수님이신 생명의 떡이 된다는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이 된다.

예수님이신 말씀에 생명이 있다. 오늘 먹을 생명의 떡은 무엇인가?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깊이 묵상하고 먹을 때 예수님이신 생명의 떡을 먹게 된다. ‘생명의 떡’에는 먹은 자만이 알 수 있는 ‘환상적인 맛’이 있다.

마음의 표적

마음의 표적
요한복음6장 21절~40절

요한복음6장 29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시간이 없어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특별한 재능, 자질, 은사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헌신에 대한 순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을 맡기기도 한다.

하나님의 일은 많은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믿는’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표적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없는 사람이 있다. 군중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군중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찾으려 하지 않고, 떡을 먹으려고 하였다(요6:26).

한국에서 교회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높다. 특히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 회복의 소리이다. 이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복을 따로 보았던 한국인의 무속신앙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과 복을 따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다. 예수님과 복을 따로 구분해서 보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복만 찾게 된다. 가난하였던 한국 교인들에게 ‘먹을 복’만 강조하였지 ‘먹을 복’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렸기 때문에 복만 찾게 되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을 영광을 가로 채고 있었지는 않았는가하는 자성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표적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예수님을 만나도 예수님의 표적이 있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가 있다. 두 무리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도 한 무리는예수님에게서 ‘떡’을 찾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에게서 ‘떡’을 찾고 ‘떡’을 주시는 예수님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한 무리는 예수님의 표적이 있고 다른 한 무리에는 예수님의 표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초점을 두었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물고기와 떡’에 초점을 두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 한 무리는 ‘떡’을 먹고, ‘떡’만 찾았고, 다른 한 무리는 ‘떡’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소원하였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자녀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 사업이 번창하게 해달라, 빚을 갚게 해달라, 어려움 속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받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예수님의 표적을 마음에 새길 수 없다. 받은 응답에 감사하여 예수님께 한 발 더 나가야 마음의 교제를 할 수 있다. 마음의 표적은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표적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마음의 표적이 더 뚜렷해진다.

오늘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 일을 찾아 마음의 표적을 더 깊이 새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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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시작

두려움의 시작
요한복음 6장 16절~21절

요한복음 6장 19절,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은 사업이 망할까봐 두려워한다. 건달들은 두려워서 주먹을 쓴다. 어린 아이는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자기가 원한 것을 이룬 어른은 이룬 것을 잃어 버릴까봐 두려워한다.

두려움의 시작은 죄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시작이 되었다. 창세기3장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어 벗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하는 것도, 어른이 두려워하는 것도 죄 때문이다. 사물을 인식기 시작하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고, 나를 바라보면서 무의식 중에 있는 죄가 두려움을 만든다.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유아들은 자기를 보호해 주는 엄마가 없을 때 두려움이 생긴다. 죄는 하나님이 없음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못할 때 두려움은 시작이 된다. ‘벌거벗었다’라는 말의 뜻은 죄중에 있는 너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이다.

두려움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생물학적인 ‘신호등’이다. 두려움이 없으면 육체를 보호하지 못한다. 두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과 같이 불에 뛰어 들것인가? 두려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육체는 자기가 보호해야만 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이제 혼자 벌거벗은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암흑 속에 혼자 있는 두려움아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감옥에서 가장 큰 형벌은 빛이 들지 않는 곳에 혼자 감금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어둠이고 또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혼자 있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혼자였다. 혼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요한복음 6장 17절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제자들의 두려움의 시작은 육체를 지키기 위하여 어둠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사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바다 안에서 어두워서 두려워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두려움의 시작은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시작이 되었다. 자신을 보호할 분이 없고, 자신을 보호할 분이 계시지 않으니 어디로 갈지 방향도 잡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의 시작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시작이 된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내가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물어보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아는 방법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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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낳는 기억

기적 낳는 기억
요한복음 6장 1절~16절

요한복음 6장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면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살다 보면 기적을 보고 싶은 때가 있다. 어느 목사님께서 기적은 가장 어려운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황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일반적인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일반적인 현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을 기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오늘 말씀은 두 사람의 믿음의 대조를 보여 준다. 빌립의 믿음은 보이는 현상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장정만 오천명)을 먹이시려고 하였다. 그때 빌립은 이 많은 무리에게 양식을 사서 먹일 곳을 찾을 수도 없고, 사서 먹일 곳을 찾는다고 해도 돈이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무리를 먹이자고 말했을 때 안드레는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져가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어 보았다.

안드레는 예전에 엘리사가 이곳에서 했던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게 되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엘리사의 때에 흉년이 들었다. 엘리사의 제자들이 굶어 죽게 되었는 때에 엘리사는 보리떡 이십개와 몇 개의 채소를 가지고 백 명의 제자들을 먹고 남았다(왕하4:43-44). 말씀에 따라 말도 되지 않은 일에 순종하였더니 엘리사는 얼마 되지 않은 음식으로 제자들 백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을 만한 양식을 줄 수 있었다. 안드레는 엘리야가 백명의 제자를 먹인 일을 기억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상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말씀을 기억하였더니 안드레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예수님의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한다면 평범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매일이 기적일 것이다. 살아 숨쉬는 것도 기적이요, 음식이 들어가서 소화가 되는 것도 기적이요, 말씀을 기억하는 것도 기적이다. 기억은 기적을 낳는다. 평범한 일에 기적이 있다.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기억할 때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상적인 상황,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내가 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에 가장 마지막 희망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늘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신 일은 무엇일까? 예수님을 기억할 때 평범한 삶에서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예수님이 내게 행하신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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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선율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은 예전 고등학교 학생들보다 거짓말을 더 많이 한다고 ESL 고등학교 선생님이 푸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학생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은 부모가 예전 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진실함이 사라져가고 있는 단면을 보이고 있다.

한국 730보궐 선거에서 두 사람이 이름이 거론이 된다. 나경원, 이정현 의원이다. 특히 이정현 의원은 순천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서갑원 후보를 이겨서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새누리당은 전라도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하였지만 이정현 의원이 기존의 새누리당의 선입관과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전라도지역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정현 의원이 국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의 성실과 진정성이 순천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진실함이 순천지역의 주민의 마음을 얻은 원동력이었다 생각한다. 자전거로 골목 골목을 다니면서 한 표를 호소하는 이정현 의원의 모습에서 진실의 힘을 몸으로 표현하였다. 한 마디로 몸으로 보인 ‘정직’이 기적을 일으켰다.

가족 상담에서 가족이든 개인이든 가지고 있는 문제를 치료하려면 가족이나 개인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치료할 수 있다. 문제를 치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큰 힘이 정직이다. 정직하게 가지고 있는 문제를 인정하고 정직하게 문제를 상담자에게 말하여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정직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거짓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정직’이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들어내면 불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나를 감추면 감출수록 다른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를 이용할 사람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힘이 ‘정직’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힘은 정직 속에 담겨져 있는 진정성이다. 건달은 자신의 주먹을 믿고 주먹으로 사람을 친다. 건달은 사회의 부정적인 한 시각이 분명하지만 건달이 보이는 ‘악한 정직(?)’이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

진정성은 ‘integrity’로 투명한 마음을 말한다. 음악에서도 작곡자의 마음이 곡에 정직하게 담겨질 때 그 선율이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투명한 선율이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투명한 선율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힘이 된다. 그러한 투명한 선율을 그리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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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음성

들리지 않는 음성
요한복음 5장 30절~47절

요한복음5장 37절~38절, “37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대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지만 곧 손에서 책을 놓게 된다. 책대로 해보아도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보다 더 자녀와 대화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보다 더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대화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지 않다. 책대로 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오늘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둘째, 성경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첫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두 번째는 성경을 탐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은 부드러운 말일까 아니면 엄한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은 큰 소리일까? 아니면 작은 소리일까? 하고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궁금하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1년, 2년, 3년 지속이 되면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면 우리와 생각하지 못하였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있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셨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의 감각 넘어 있어서 인간이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환경에서, 때로는 설교로, 어떤 때에는 밖에서 직접 들리는 음성(사무엘이 들었던 음성)으로, 어떤 때에는 마음에서 들리는 작은 음성(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소리)으로 우리와 대화를 하신다. 하나님과 대화 중에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도 있지만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나를 지지하는 말은 들리고, 나를 반대하고 거절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요5:43)”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왔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뒤로 숨으시고 아버지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의 모습이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서로 소통하는 모습이다.

나를 나타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여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지 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들려주시는 들리지 않는 음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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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아래 있는 영생

죽음 아래 있는 영생
요한복음 5장 19절~29절

요한복음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장례식장에 가보면 죽은 자를 애도하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유교적인 관습으로는 자녀들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자녀들의 애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질문을 해 본다.

오늘 말씀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 때’라고 말한다. ‘이 때’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현재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죽으면, 죽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영생의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말씀하신 영생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다는 말이다. 영생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현재 완료형을 쓴다. 현재 완료형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현재에 이루어진 사실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터무니 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생의 말씀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의 공통점은 ‘지금’ 영생이 내게 주어졌음을 보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고 외친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말해도 믿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망’에 있음을 진실로 강조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다시 살린다는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었음을 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아직 ‘사망’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영생은 어디에 있는가? 영생이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 진나라 진씨황제도 ‘불로초’를 찾아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오늘도 사람들은 영생을 먼 곳에서 찾고 있다. 영생을 먼 곳에서 찾는 이유는 육신의 욕망으로 영생을 찾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한 것을 듣지 않고 다른 소리들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지 않고 영웅들이 한 일들을 바라 본다. 육신의 욕망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고, 스스로를 높아지려 한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영생을 가까운 곳에서 찾지 않고 먼 곳에서 찾게 한다. 영생이 먼 곳에 있어야 ‘자기’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면 찾지 못한다. 자기의 힘으로 영생을 찾으려 하지만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님도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요5:19)”고 말씀하신다. 영생과 죽음은 바로 옆에 있는데 영생을 찾기 위하여 먼 곳에서 헤매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요, 영생을 가까이서 얻으려 하면 살 것이다.

죽음 아래 영생이 있다. 자기를 높이면 죽지만 자기를 낮추면 생명을 얻는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아래 있고, 죽음에서 자기를 낮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살지만, 죽음에서 자기를 높이면 죽기 때문이다. 죽음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는가? 몸을 낮추는가 아니면 몸을 높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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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꼬 없는 찐빵

앙꼬 없는 찐빵
요한복음 5장 10절~18절

요한복음 5장 10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한다. 내가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리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가치관이 없다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옳은 것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일 된다.

한국은 국회에서 법을 제정한다. 법의 근간은 ‘법의 정신’이다. 정의가 법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또한 ‘정의’가 사라진 법의 집행이라면 법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 논쟁이다. 십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하고 있다.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안식’ 즉 ‘쉼’을 통하여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보다 ‘쉼’에 우선시 두었다. 법의 정신이 사라지고 법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거룩이 없는 쉼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한 쉼은 거룩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

과거의 유대인이 행하였던 ‘쉼’에만 우선시 두었던 일들을 교회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전통이 성경보다 우선시 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 ‘사람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라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고,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반응하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하여야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유대인은 예수님께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박해를 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핍박하였다. 사랑이 없는 율법, 예수님 없는 율법은 더 이상 율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에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함께 하면 ‘정의’가 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도 옳은 일이든 그른 일이든 ‘다수’가 옳은 사회가 되었다. 어떤 때에는 소수의 말에 경청해야 할 때가 있다. 소수의 말에 경청하지 않는 ‘다수’는 민주주의 정신을 잃어버린 앙꼬 없는 찐빵의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백성 전체’가 주인이지 ‘백성의 다수’가 주인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의지, 감정이 성경에 부딪쳐 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앙꼬의 맛을 보지 못하는 찐빵을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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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까?

시간이 지나면 이루어질까?
요한복음 5장 1절~9절

요한복음5장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대기만성’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인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오래 기다리면 큰 그릇이 만들어지는가? 오래 기다리면 큰 인물이 되는가? 시간이 지난다고 큰 그릇이 되거나 큰 인물이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큰 인물이나 큰 그릇이 된다면 큰 그릇이나 큰 인물만 세상에는 남아 있어야 한다.

예전에 은퇴하신 목사님들이 “준비된 만큼 하나님께서 쓰신다”라는 말을 하셨다. 잘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쓰신다는 말이다. 준비된 사람이 쓰일까? 준비된 사람이 쓰이지만 준비된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 의해서 쓰이게 된다. 요즘에는 준비된 만큼 쓰인다고 말하는 목사님들을 잘 만날 수 없다. 오히려 쓰이려면 ‘성골’이든 ‘진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목사님들을 만날 수 있다. 무슨 말일까? ‘성골’은 아버님과 장인 어른 모두 목사(혹은 장로)인 경우, ‘진골’은 아버님이나 장인 어른 한 분이 목사(혹은 장로)인 경우를 말한다. 예전의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준비 된 사람들은 있지만 준비된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이 없어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시느라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계시다”고 말하신 은퇴하신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이 난다.

오늘 말씀은 서른 여덟 해가 된 병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병을 낫고자 하여 베데스다 연못에 있었지만 38년이 지나도 병이 낫지 않았다. 처음에 베데스다 연못에 병자가 왔을 때는 병을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자 병을 낫고자 하는 의지는 점점 사라져갔다. 현실에 순응하였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길을 찾았다. 그리고 병자는 하루 하루를 아무 의미 없이 보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찾으시고 가까이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병자에게 묻으셨다.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나는 병을 고치러 왔는데 병은 고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 중에 하나는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가족 문제도 해결이 되고, 세월이 지나면 현재의 고통도 사라지고, 세월이 지나면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진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이 약인가? 세월은 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족의 문제는 세월이 지날 수록 더 커진다. 비록 문제가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고 수면 밑에 있어서 해결된 것 같이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비밀’이 되어 수면 밑에 있던 문제는 아들 세대, 손자 세대까지 괴롭히는 문제가 된다. 세월이 지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고통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들이 솟아 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걸림돌만 만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마음의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가? 소원을 이루려면 어린아이가 먹고, 자고, 입고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소원을 위하여 먹고, 자고, 쉬고, 일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나가면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늘 앉은뱅이 병자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앉은뱅이 병자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시간이 지났는데 이루지 못한 마음의 소원이 있는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그러면 시간이 지나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마음의 소원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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