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 해야 할 것

구별 해야 할 것
베드로후서 2장 1절~8절

베드로후서 2장 1절,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신자는 거짓 선생이나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거짓 선생이나 거짓 선지자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고, 그들은 욕심을 품고 말을 지어내어 신자의 마음을 훔친다. 또한 그들과 그들을 따른 자들은 파멸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신자들은 거짓된 선생과 선지자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특히 그들은 더러운 정욕에 가운데 육체를 따라 행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범하고 완고해서 위엄있는 자들을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엄있는 자들이 그들로 인하여 오히려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주님은 위엄있는 자를 보호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고, 그들을 건지신다.

거짓 선생이나 선지자들은 신자를 위하는 행동을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한다. 그들은 예배, 기도, 말씀 연구에 열심인척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신자들을 속이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함이다. 주님은 그들을 멸망할 자라고 말하신다. 멸망할 자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망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거짓 선생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 마음의 동기를 살펴야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다. 그들의 동기는 정욕이요, 그들의 행동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들의 열매는 악하다. 그러나 참 선생들이나 참 선지자들의 동기는 긍휼(mercy)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일치한다. 또한 그들의 열매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확실치 않은 예언

확실치 않은 예언
베드로후서 1장 12절~21절

베드로후서 1장 13절~14절, “13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이 땅에 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장막’이라고 표현하였다. 장막이란 뜻은 한데서 볕 또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둘러치는 막을 말한다. 바울은 육신의 장막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4).”

베드로는 자신이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벧후1:14). 곧 장막을 벗어날 베드로는 소아시아 신자에게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첫째, 신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기억해야 한다(벧후1:17). 두 번째는 신자는 마음에 확실한 예언이 떠오를 때까지 거짓 교사나 선지자들의 예언을 주의하라고 말한다.

요즘 신자들이 예언기도를 받으러, 혹은 능력을 받으러, 혹은 치료를 위하여 여기 저기 기도하시는 분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하는 분들을 찾아가기 전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확실치 않은 예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신자는 조심해야 한다.

신자의 도리

신자의 도리
베드로후서 1장 5절~11절

베드로후서 1장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는다”에서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는 신자를 향하여 행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신자가 행하여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신자가 행하여야 하는 행동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이다. 신자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벧후1:5-7 참조).

일반적으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으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 있으면 되지,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들은 행해야 마음이 이것들로 풍성해진다고 말한다(벧후1:8 참조). 또한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행하여야 마음이 죄에서 멀어진다고 말하고 있다(벧후1:9 참조).

신자가 행하여야 하는 도리가 이러한 것들이다. 우리도 신자의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여야 우리가 신자의 도리를 하게 된다. 우리가 신자의 도리를 하기 위하여 믿음에 올바른 방향이 있어야 하고(덕), 올바른 방향을 세우기 위하여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고,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하여 마음의 욕정을 통제해야 하고, 마음의 욕정을 통제하기 위하여 참아야 하며, 참아야 거짓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경건), 거짓과 구별된 생활을 하여야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이 넘치게 된다.

경건한 두려움

경건한 두려움
베드로 후서 1장 1절~4절

베드로후서 1장 3절~4절, “3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후서는 거짓된 지식, 참된 지식,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알려준다. 거짓 선지자나 교사들이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탁하게 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교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믿음을 지켜나가기는 방법을 제시한 편지가 베드로 후서이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려면 생명과 경건이 있어야 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이미 믿음을 지킬 능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의 신성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은 ‘부르신 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신 이를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영광과 덕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보이는 경건한 두려움이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했다. ‘이루라(work out)’는 뜻은 ‘완전히 완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은 바울이 언급한 ‘두렵고 떨림’과 연결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경건한 마음, 즉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태도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을 우리가 나타낼 수 있다.

요즘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고 있다. 우리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였던 가정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가 약하거나 사라진 가정에는 하나님에 앞에 나갈 때 있어야 하는 태도 즉 ‘경건한 두려움’ 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루의 생활

하루의 생활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는 사자 같다는 말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는 사자의 모습을 연상되는 말이다. 초대 교회에 믿음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황제가 골로세움(로마의 원형 경기장) 속에 넣어 우는 사자가 그들을 쫓게 했다. 그들은 사자에게 먹히면서도 그들의 모습은 행복한 모습이였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였다.

우는 사자에게 쫓기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이 하여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둘째, 근신하여야 한다. 셋째,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베드로가 우는 사자에게 먹히는 실패한 경험에서 우러 나온 교훈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다시 돌아온 후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났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우리가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진줄 알라고 성경은 말한다(고전10:12참조). 우리가 염려한다는 뜻은 생활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려는 뜻이다. 우리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면 근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깨어 있을 수가 없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 생각하게 말씀이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겸손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겸손
베드로전서 5장 1절~4절

베드로전서 5장 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오늘 말씀은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이다.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사람들이다(벧전5:1 참조).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돌보는 일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으로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고, 지배하려하지 말고 양무리의 모범이 되라고 베드로는 권면한다.

장로들은 겸손과 성숙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웠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한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을 하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말했다(마26:33).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마26:34)”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함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살겠다고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있다. 겸손한 척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한 겸손이며, 이는 겸손을 가장하여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교만한 마음이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겸손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 마음을 경계하고 그 마음을 절제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성숙하고 겸손해진다.

불시험

불시험
베드로전서 4장 12절~19절

베드로전서 4장 12절~13절, “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들을 연단하려는 불시험이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불질렀다고 비난을 받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 궁의 정원을 밝히는데 살아 있는 횃불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베드로는 지방관리들도 로마 황제의 본을 따라서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로 굽는 일을 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아시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로 받는 박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Bible Knowledge Commentary, 60 참조).

우리가 받는 불시험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으로 부터 받는 비난들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까닭없는 누명을 쓰기도 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악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짖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불시험에는 세 가지 유익이 있고 성경은 말한다. 첫째, 불시험은 우리가 정욕에 따라 살지 않도록 한다(벧전4:1-2). 불시험은 하늘의 상급이 있다(벧전4:12-13). 마지막으로 불시험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벧전4:19).

우리에게 불시험이 없으면 좋은 일이지만, 불시험이 없으면 우리의 영은 자라지 않는다. 우리의 영이 자라려면 불시험을 지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불시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종말의 때에 가져야 할 세 가지 태도

종말의 때에 가져야 할 세 가지 태도
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베드로전서 4장 7절,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종말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은 넘친다. 초대교회의 신자들도 종말에 대한 소망(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현재의 신자들도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종말을 대하는 태도는 초대교회 신자와 현재의 신자가 달라보인다. 오늘날 어떤 신자들은 종말에 대하여 과민하게 반응하는 신자들이 있다. 오늘 말씀은 종말의 때에 신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준다.

신자는 종말의 때에 취해야 할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 정신을 차리고, 둘째, 깨어 있어야 하고, 셋째 기도하여야 한다. 정신을 차린다는 뜻은 세상이 말하는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번째로 깨어 있다는 뜻은 주변 환경을 잘살피고 분별하면서 살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도움을 받아야 할 연약한 인간임을(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고백하는 태도를 말한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 첫번째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준다. 종말이 오면 우리는 기도가 먼저라고 생각을 하는데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세상의 가치로부터 지키는 일이 먼저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취해야 할 태도는 우리는 환경을 구별해야 한다. 죄를 짓게 되는 환경이나 죄를 짓기 쉬운 환경은 피해야 한다. 그러면 종말의 때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생각 지키기

생각 지키기
베드로전서 4장 1절~6절

베드로전서 4장 1절~2절,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로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정신 분석학은 욕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욕구를 누르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게 되어 신경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욕구를 누르면서 살면 언제가 욕구는 폭발한다. 욕구를 누르면 인간의 마음은 답답해지고, 마음에 병이 찾아온다. 인간은 욕구를 풀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욕구대로 살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 신자는 육신의 정욕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라고 성경은 말한다.

오늘 말씀은 ‘너희도 같은 생각(마음)으로 무장(벧전4:1)’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같은 생각’이란 ‘그리스도께서 그때 우리를 위하여 육체로 고난을 받았다는 생각’을 말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육체의 고난이 우리가 육신에 따라 살려는 욕구를 끊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위의 생각을 굳건히 지킬 때 육신의 욕구에 따라 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생각을 지키기’ 위하여 해야 벗어야 할 행동이 있는데 음란, 정욕, 술취함, 향락, 우상숭배의 행동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지키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리가 서로가 뜨겁게 사랑하여야 하는 일이다.

대사(大使)의 조건

대사(大使)의 조건
베드로전서 3장 13절~22절

베드로전서 3장 13절~14절, “13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절: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신자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해할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신자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두 말씀을 읽을 때 두 말씀이 서로 상충되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다는 말씀은 이사야서 50장 9절의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사50:9 전반부).” 그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4장 14절 말씀이 떠오른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벧전4:16 전반부).”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자가 없다는 말씀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는 말씀과 떠오른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 그 뜻이 더 명확해진다. 그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에 우리를 해할 자가 없지만 그리스도로 하여 우리가 스스로 고난을 받으면 우리가 특권을 누린다고 해석이 된다(여기서 복은 ‘마카리오이’라는 Greek어로 ‘대단한 특권’을 누리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특권을 누리면 그리스도의 대사(大使)가 된다. 대사란 뜻은 ‘특명 전권 대사’의 준말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사가 될 것인지 말 것인지 묻는 말씀이다. 우리가 대사(大使)가 되는 조건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의지해야 그리스도 대사가 된다(벧전3:14-15절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 대사가 되면 이 땅에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아래 순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